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LAZYVIDEO solo exhibition

2022.11.01.SAT - 11.26.SAT

spectrum gallery

 

 

 

 

 

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.

꽤 고급스러운 빌딩의 수많은 창문 중 한 칸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온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. 말쑥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 나 대신 버튼을 눌러두었다. 얼마 안 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우리는 둘 다 서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로 올라탈 수 있었다. 그저 각자의 목적지에 해당하는 버튼을 꾹 누르고는 정사각형의 좁은 바닥 면 양쪽 모서리에다 발바닥 두 개씩을 눌러 붙인 채로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.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.

그런데 이 말쑥한 차림의 깡마른 남자가 난데없이 방귀를 부우웅 하고 뀌는 것이었다.

그 맥없는 소리에 남자보다 약간 더 뒤쪽에 서 있던 나는 그저 멀뚱히 그 말없는 뒤통수를 쳐다보았다. 한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지만, 그는 끝끝내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도 내 쪽으로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았다. 나는 분노에 찼다가, 힘이 없었다가, 흐려졌다가, 불확실해졌다. 그는 방귀 한 방으로 내 존재를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.

개인은 완전히 투명해질 수 있는가? 나는 그 남자의 방귀 소리를,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뒤통수를, 단정한 푸른색 셔츠를 번갈아 곱씹으며 질문해 보았다.

 

집단 안에서 몇몇 개인은 완전히 투명해져 그 존재를 상실하기도 하는가?

커다란 빌딩, 창문마다 꽉꽉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 위치한 정사각형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‘나’는 그 남자에게 있어 얼마나 투명했을지를 짐작해본다. 집단 안에서의 개인이란 때때로, 아무 색도 반사하지 못하는 까만 머리칼, 까만 눈동자 두 쌍만으로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 꽤 투명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.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데서 오는 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은, 집단의 최소 단위이기에 필연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이 어떤 고립감은, 정말로 순수하게 개인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모양이다. 이렇게나 쉽게 부정당하는 개인으로써의 존재감이란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? 개인을 정말로 지치게 만드는 것은 일이나 돈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배반당하는 존재감일지도 모르겠다. 과연 도시, 집단, CITY는 보이지 않는 개인을 접붙인 것에 불과한가? 도시, 집단, CITY의 자아에는 개인이 영역에만 존재하는 슬픔과 지침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?

나는 슬픈데, 이 도시는 슬프지 않은가?

 

이제 이 도시가 울었으면 좋겠다. 어둠 속에 잠겨 든 개인이라고 해도, 그 안에서 들끓는 고립감과 분노, 힘없음, 흐려짐, 불확실함, 슬픔은 투명해질 수 없는 모양이다. 어둠에 묻혀서도 두 눈깔만큼은 형형하게 빛내며 뭐라도 외쳐보아야겠다. 왜 내가 여기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방귀를 부웅 뀌느냐고 따져 물어야겠다. 분노든 슬픔이든 꺼내 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, 터질 것처럼 길을 잃어버린 이 갑갑한 무엇인가를 작살에 묶어 도시 한 가운데로 힘껏 던져보고 싶다. 그 끝에 달린 것이 날카롭게 버려진 권태로움이라고 해도, 무언가를 죽도록 아프게 꿰뚫어서 찔끔 눈물이 날 만큼 단단하게 연결되고 싶다.

 

레이지비디오 작가노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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